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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동작 어렵지 않게 연기하는 김연아의 모습에 전문가들 찬사 이구동성
등록날짜 [ 2014년02월28일 10시07분 ]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위츠(1903~1989)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물론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에밀 길렐스, 마르타 아르헤리치, 글렌 굴드 같은 이름있는 피아니스트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꼽으라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호로위츠를 맨 처음에 거론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호로위츠는 연주 도중 악보를 잊어버리는, 일명 메모리 슬립(Memory Slip)의 대가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연주했던 부분을 다시 연주하거나 심한 경우엔 한 쪽 분량의 악보를 건너뛰고 연주를 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이런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그가 어떻게 해서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을까요?

 

호로위츠의 연주는 격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작품의 해석을 명료하게 했으며 이를 자신의 연주로 청중에게 명확하게 전달했습니다. 그의 연주는 애매하게 넘어가는 부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클라이맥스는 제대로 느낌을 살렸으며 포즈조차도 의미를 담아냈습니다. 불분명하게 남아 있던 악보의 구석구석이 호로위츠의 연주로 명쾌한 해답을 찾게 되었고 청중은 이 점에 열광했던 것입니다.

 

특히, 호로위츠는 동료 피아니스트로부터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연주가 어려운 부분을 별것 아닌 것처럼 쉽게 소화해내는 호로위츠의 모습을 보며 동시대의 연주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은 힘들고 어렵게 연주했던 부분을 호로위츠는 자신의 큰 손으로 마치 건반을 한 번 쓱 닦고 지나가는 듯 편안하게 연주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번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 역시 호로위츠의 연주처럼 물 흐르듯이 유연하고 편안해 보였습니다. 어려운 동작을 어렵지 않게 연기하는 김연아의 모습을 보며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저 동작이 저렇게 쉬워 보일 수 있을까요?”라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클래스가 다른 연기를 펼쳤음에도 그 결과는 대중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김연아가 은메달에 그친 모습을 보면서, 수년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 컨서버터리(Conservatory:음악학교)의 존 매카시(John McCarthy) 전 학장과 나눴던 담소가 생각났습니다. “만약에 호로위츠가 피아노 콩쿠르 무대에 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아요? 물론 호로위츠가 연주활동을 할 당시에는 콩쿠르가 요즘처럼 많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연주에 순위를 매기는 따위의 행동에 까칠하고 예민한 성격의 그가 절대로 동의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가정을 한다면 아마도 호로위츠는 우승은커녕 입상도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요. 왜냐하면 메모리 슬립을 밥 먹듯이 하는 호로위츠가 콩쿠르에서 입상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콩쿠르에서는 입상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그의 말에 필자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존 매카시 전 학장은 계속 말을 이어갔습니다. “콩쿠르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해마다 전 세계에서 콩쿠르 우승자가 수십 명씩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그 우승자들이 모두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나요? 아니거든요. 음악은 소리로 청중에게 감동을 줘야만 사랑받을 수 있는데, 콩쿠르에서처럼 박자 맞춰서 ‘또박또박’ 안 틀리면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만으로는 청중에게 어필할 수 없지요.”

 

생각해 보니 현재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랑랑과 예브게니 키신의 경우도 콩쿠르로 스타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예브게니 키신의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콩쿠르 무대에 선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키신이 호로위츠의 명맥을 잇는 21세기 대표 피아니스트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이한 점은 키신 역시 악보대로 무난하게 연주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 피겨 세계 챔피언인 커트 브라우닝은 뉴욕타임스를 통해, “김연아가 소트니코바보다 더 잘 탔다. 하지만 이것은 스케이팅 경쟁이 아니라 수학이었다. 단순히 점프를 잘한 선수가 예술가를 이겼다. 이것은 피겨스케이팅의 가치를 스스로 격하시킨 것”이라고 논평했습니다. 이러한 논평은 호로위츠가 콩쿠르 무대에 선다면 우승하지 못할 것이라는 존 매카시 전 학장의 주장과 일맥상통합니다.

 

올림픽이 됐든 콩쿠르가 됐든 참가자들의 순위를 매겨야 하는 경연대회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합니다. 바로 채점을 위한 정답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꿔 말한다면 채점의 요소들을 인지하고 점수를 따는 것에 집중을 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마치 소트니코바가 기우뚱거리며 점프를 마무리 했는데도 트리플 점프를 한 번 더 했기 때문에 보너스 점수를 김연아보다 더 얻은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가 진정한 챔피언인지 알고 있습니다. 점수에 연연해하며 금메달에 목 매는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디오스 노니노(Adios Nonino)의 아름다운 선율이 마치 자신의 스케이트에서 나오는 듯하게 느껴지게 했던 김연아의 마지막 무대는 이미 점수로 환산하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피겨스케이팅 종목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스타는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소냐 헤니, 카타리나 비트, 미셸 콴 정도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에 김연아라는 이름 하나가 더 추가될 것입니다. 운 좋게 금메달을 목에 건 소트니코바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챔피언이 되기 위해선 갈라쇼에서 거추장스러운 깃발을 들고 나오는 것과 같은 무모한 시도를 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실된 연기를 하는 것을 김연아에게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TV 토요일 아침 '모닝와이드' 담당.

 

편집국 (c1221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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