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전이었습니다.
당시 고발 프로그램을 담당했던 필자는 속칭 '빨간 마후라'라는 음란 비디오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포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취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학생 세 명과 여학생 한 명이 가정용 캠코더로 자신들의 성행위를 촬영한 것인데 이 비디오가 청소년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면서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었고 같은 시기에 필자도 취재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당시 '빨간 마후라'는 청소년들 사이에 인기가 꽤 있었는데 그 이유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 학생들의 성행위 장면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거였습니다.
즉, 연기나 연출이 가미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면서 기존의 포르노 테이프를 통해서는 느낄 수 없는 ‘사실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빨간 마후라’의 인기 비결이었습니다.
‘빨간 마후라’라는 제목은 등장하는 여학생이 빨간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비디오를 본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빨간 마후라’라고 부르게 되면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사건은 비디오 테이프 속의 등장 인물들이 경찰서에 연행되면서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있고 한 달여가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들른 비디오 대여점에서 필자의 가슴은 다시 한 번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비디오 대여점의 한 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성인 비디오들의 제목들이 ‘빨간 마후라’의 형제 사촌뻘로 바뀌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빨간 보자기’, ‘빨간 목도리’, ‘빨간 주머니’, ‘빨간 손수건’, ‘빨간 스타킹’ 등등 수없이 많은 ‘빨간’시리즈들이 벽면을 빽빽하게 장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포르노 영상을 찍은 아이들보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돈벌이에 이용하는 어른이 더 큰 문제다.”라고 한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언젠가부터 TV에 리얼리티 쇼가 봇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1999년 네덜란드에서 첫 방송을 시작한 '빅 브라더(Big Brother)'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영국에서 만들어져 전 세계 포맷 시장으로 진출한 '서바이버(Survivor)', 미국의 '아메리칸 아이돌(Ameriacan Idole)', '템테이션 아일랜드(Temptation Island)' 같은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이 TV프로그램의 지형을 바꿔놓았습니다.
일반인들이 TV에 출연해서 상황 설정에 대응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나와 다를 바 없는 일반인들이 보여주는 실제의 모습을 보며 더욱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프로그램에 더 쉽게 몰입되었습니다.
하지만 리얼리티의 인기의 비결에 대해 ‘출연자의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과 시청자들의 집단 관음증의 결합’이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합니다.
리얼리티 쇼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리얼리티’라는 단어가 주는 혼동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리얼리티 쇼는 쇼의 장르입니다.
즉, 리얼(real)한 상황을 가미한 쇼라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사실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편집을 통해 스토리의 임팩트를 증대시키고 재미있는 요소를 중점적으로 살려서 방송된다는 것입니다.
2000년 대 초반 국내 케이블 TV에서 미국의 '제리 스피링거쇼'를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자 제리 스프링거(Jerry Springer)는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시장을 역임한 적이 있는 저명한 인물인데 그의 쇼는 한마디로 ‘막장’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스튜디오에 바람핀 남편과 그의 아내가 앉아 있고 화면에 이 남편이 외도를 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배신감에 분노하는 아내 앞에 남편이 외도를 했던 상대 여성이 등장합니다.
아내는 상대 여성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려고 하고 스튜디오에 배치된 건장한 안전요원들이 아내를 제지합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내는 남편에게 소리칩니다.
“저 여자와 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 라고 말입니다.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난 당신을 사랑해, 그런데 저 여자도 좋아해.” 순간 스튜디오는 난장판이 됩니다.
‘뭐 저런 프로그램이 다 있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저 사람들을 출연하게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 것입니다.
‘자신의 치부가 만천하에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저질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은 몇 해전 필자가 미국에서 방송에 관한 공부를 하며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는 도중 얻게 되었습니다.
답변은 대략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거절하지 못할 많은 출연료의 유혹이 있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일반인 출연자의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사고방식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실제의 자기 모습과 TV에 출연하는 자신의 모습은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TV에 등장하는 자신은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일 뿐 실제 자신의 모습은 아니라는 인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CBS의 '서바이버'에서 일반인 출연자들이 실제로 사랑에 빠져서 키스를 했는데 마지막 편에서 상대 여성이 "나는 남자친구가 있는데 무슨 말이냐? 연기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일화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이야기를 조금 확대해서 생각하면, 시청자들은 리얼하지 못한 리얼리티 쇼를 리얼한 줄 알고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출연자 매수와 스토리 조작 논란에도 불구하고 '제리 스프링거쇼'는 17시즌 동안 3,000회가 넘게 방송되었습니다.
이런 저질 프로그램의 성공을 보며 아류작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장르는 조금 달랐지만 출연자들에게 벌레를 산 채로 먹게 만들었던 '피어 팩터(Fear Factor)'도 너무나 자극적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국내에서는 '화성인 바이러스'라는 프로그램이 자극적인 소재로 자주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무려 244회나 방송이 되었던 이 프로그램도 표면상으로는 성공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빨간 마후라가 빨간 목도리, 빨간 스타킹 같은 어처구니없는 모방 작품을 만들어 냈던 것처럼 TV프로그램도 어떤 포맷이 인기를 얻으면 우후죽순처럼 그 아류 작품들이 생겨납니다.
지금은 리얼리티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쇼 프로그램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이름에 현혹되어 진짜 리얼리티라고 착각하면서 보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TV 토요일 아침 '모닝와이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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