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부활절 아침, 무고한 어린 생명이 떼로 수장(水葬)될 지경에서 혼자 살겠다며 도망친 선장과, 돈 몇 푼에 스승 예수를 판 유다가 겹쳐 떠올랐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제가 그리 좋은 사람이 못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내가 그 상황에 처하지 않은 것, 다행히 나는 예수의 직접 제자가 아니고 특히 배를 모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
순직을 한들 누가 알아줄 것이며, 어차피 자기밖에 모르는 세상, 잊히면 그뿐, 나부터 살고 보자’는 갈등에 놓이지 않은 것도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합니다.
팔아 넘긴 건 예수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유다, 미욱함으로 일은 이미 벌어졌지만 뒤늦게 오열하며 예수를 판 돈과 자기 목숨을 내던지는 유다는 될 수 있을까 싶다가도 그도 자신이 없습니다.
재수없었다는 듯 물에 젖은 돈을 말리고, 조사받는 중에 엉덩이가 아프다고까지 한 선장의 파렴치에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나이다.”라고 한 십자가 형틀의 예수의 말을 떠올릴 수는 있어도 대놓고 욕을 못하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그의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니라는 장담도 못할 뿐더러 안 당해본 일, 처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을 확신할 정도로 저는 성숙한 인격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비겁함이 경멸스러워 죽겠던 차에 "임진왜란 때는 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고, 625 때는 전쟁 지도부가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가더니, 이번엔 선장이 승객을 버리고 내뺐다."며 분개한 어느 네티즌의 말이 시대와 상황,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결국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로 들려 제겐 오히려 위안이 됩니다.
침몰 직전까지 승객을 구조한 후 가라앉는 배와 운명을 함께 한 타이태닉 호 선장의 행위는 그래서 영웅적입니다.
사람의 인격은 결정적인 순간, 즉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울 때 확실히 나타난다고 하듯이 절체절명의 때에, 세월호 선장과 타이태닉호 선장의 태도가 타인의 운명을 확연히 갈라놓았습니다.
이번 참사로 인해 매스컴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소리가 ‘원칙대로’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며 사회의 불행은 각자 할 일을 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는 말과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서로 돕고 살 수는 있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 그것이 바로 누군가를 돕는 일이 된다."라는 말도 ‘원칙대로’와 무관하지 않게 들립니다.
세월호 선장이 원칙을 뒤집지 않았다면 배가 뒤집히지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속으론 ‘원칙 좋아하시네’ 하고 냉소를 머금게 됩니다. 남의 집구석은 관두고 내 식구만 봐도 원칙대로, 양심대로 기사를 쓰는 기자가 얼마나 될지.., 맥없이 '우리나라는 언론이 가장 문제'라는 질타를 듣겠습니까.
이번 사고로 거짓말하는 어른들을 못 믿겠다는 글을 쓴 어느 대학생, 돈으로 허위진단서 사서 출석 때우는 동료들의 거짓은 어떤 변명으로 둘러댈 건가요. (하긴 돈 주고 교수 자리 사는 대학 문화에서 배웠다고 하면 할 말 없지만.)
취업생들, 공무원 자리만 ‘들입다 파는’ 것도 ‘철밥통’ 차지하자는 거지, 국민의 충복이라는 고결한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지요. 초 중고생들도 같은 이유로 일찌감치 경쟁에 내몰리면서 ‘그저 너만 생각하라, 돈이 제일’이라고 부모로부터, 사회로부터 무시로 주입 받고 있습니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면서요? ‘우스운 말’이 아니라 ‘무서운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대형 사고가 터질 때마다 ‘원칙대로’에 핏대를 올리는 연유는 우리 사회의 집단 투사심리에 기인하지 않나 싶습니다.
자기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성격적 결함이나 감추고 싶은 치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욕망이나 행동 등을 타인에게서 발견하는 순간, 마치 먹잇감처럼 집중적으로 비난의 화살을 쏘며 희생양을 삼는 것이지요.
누군가의 이기적인 행동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유난히 그 사람이 밉다면 자신 속에 있는 그의 것과 같은 이기심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함에도 오히려 그 사람을 맹비난하는 것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려버립니다.
우리 사회의 콤플렉스인 ‘비정상의 정상’, ‘무원칙의 원칙’이 이번 참사를 통해 자극을 받으면서, 전국민적 투사 작용이 일어나 마치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핵심은 ‘원칙대로’에 있습니다. 원칙대로 하되 개인 윤리에만 의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개개인의 이타심, 도덕성, 책임감 등이 한 사회의 질을 결정짓지만 개인의 윤리적 판단, 성숙한 자기 원칙에만 의지하고 기대하기엔 세상이 너무 복잡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스템입니다. 이른바 선진국이란 시스템이 살아 있는 나라입니다.
사회 각 분야가 효율적, 실질적 시스템 아래 반복 훈련을 얼마나 잘 하느냐, 그 결과 '학습된 의지'가 얼마나 잘 구현되느냐가 관건입니다.
요즘 노상 쓰는 엉터리 표현으로 하자면 선진국이란 국민이 '착한' 나라가 아니라 시스템이 '착한' 나라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재난과 고통을 되풀이하는 데에는 사태에 대한 감정적 대응이 장애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대형 참사 앞에 늘 그랬듯 아비규환,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감정적 소용돌이로 인해 ‘세월호’ 가 ‘세월 따라’ 잊히고 '세월 속'에 가라앉을 조짐이 벌써 보이는 듯합니다.
시스템이 작동하질 않으니 감정으로라도 쏟아내는 것인데 그러기에 참상을 통해 배우지를 못합니다.
감정적이 될수록 허탈하고 무력한 나머지 자책에 겨워 탈진하게 됩니다.
쏟아지는 말들 속에서 간혹 이성적으로 대처하자는 소리도 섞여 들고 있는데 저는 그것을 시스템으로 대처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필자소개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7월, 호주로 떠났다. 시드니에서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으로 일하다 2013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와 자유기고가,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중앙일보, 여성중앙, 과학과 기술 등에 에세이를 연재하며, KBS 라디오에 출연 중이다.
낸 책으로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고, 2013년 봄에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를 출간했다.
블로그http://blog.naver.com/shinayou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