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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날짜 [ 2015년12월28일 08시20분 ]

 

젊은 시절 윗집에 나이 든 총각이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늘 뭔가를 중얼중얼거리는 그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쳐다보면 희죽 웃으며 친밀감을 나타내기는 했습니다. 그는 고시공부에 몰두하다가 실성했다는 것이 어머니의 말이었습니다.

  한 지인은 명문 사립대의 법과를 졸업했지만 장기간 사시의 벽을 넘지 못해 취업의 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생계는 아내의 수입에 의존하면서 푼돈이라도 벌 요량으로 초단기 증권 매매를 하는 데이트레이더'로 나섰지만 주식은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반면 공원 기슭의 판잣집에 기거하면서 어렵게 서울대 법대를 나와 고시에 합격하여 법조계에 두루 이름을 날린 변호사도 보았습니다.

  무성영화로부터 시작된 검사와 여선생이 있습니다. 병든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 늘 굶주림에 시달리는 주인공은 친구들의 점심시간을 유리창 밖에서 바라보는데 선생님은 늘 그에게 자신의 도시락을 줍니다.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면서 준 저금통장의 도움으로 검사가 된 제자는 운명의 장난으로 살인누명을 쓰고 법정에 서게 된 선생님을 위해 따뜻한 사랑을 설명하면서 무죄임을 입증합니다.

  변변한 직장이 아주 귀했던 옛날 고시 합격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꽤 많았습니다. 공부 좀 하는 집의 책꽂이에서 당시 유명했던 월간 고시계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죠. 대학 시절의 여름 방학 때 경기도 오지의 절에 들어가서 아는 동생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방마다 라디오도 없이 세상과 절연한 채 물과 나무를 벗삼아 사시공부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끈기가 없어 어느 일에도 오래 몰두하지 못하는 저는 그런 사람들이 부러울 뿐이었습니다.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할 상징적인 인물인 고 노무현 대통령은 고졸로 약 7년간 독학해서 결혼하고 한참 뒤인 19751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집에서 떨어진 산기슭에 토굴 비슷한 집을 짓고 공부했죠. 그는 그때 앉아서 편히 책을 볼 수 있는 실용신안특허품인 개량독서대를 고안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누구나 응시할 수 있는 출세의 등용문인 사시를 없애려고 그가 대통령 시절 도입한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제도는 법조인의 양성을 로스쿨 출신으로 제한함으로써 학부전공의 다양성을 취하려다 법조인 양성에서 경제적 계층 다양성을 놓쳤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일본 제도를 모방하면서도 신청하면 거의 다 인가한 일본과 달리 많은 대학에 로스쿨을 차단함으로써 게임의 규칙을 짓밟았다는 반격도 나왔습니다. 대학별 로스쿨 정원 할당은 무한도전의 실력 경쟁이 아니라 배급식의 나눠먹기라는 것이죠.

  2016년 마지막 사시(1)를 남겨놓고 선발 인원을 해마다 줄이면서 사양화로 치닫던 고시촌이 최근 법무부의 사법시험 4년 존치 연장 방침 발표로 옛 기운을 찾을까 기대된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정부의 이런 발표에 앞날이 불안했던 고시촌 사람들과 이들을 상대로 생계를 꾸려온 영세 상인들은 기대를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로스쿨 재학생과 교수들은 신뢰의 원칙과 법적 안정성의 침해를 들어 사시의 존속을 반대하면서 로스쿨 자퇴, 사시 출제거부 위협 등 초강수의 반격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국회의원들이 변호사시험법 개정안 심의를 게을리 한 탓도 있습니다. 사시존치를 바라는 수험생 백여 명이 최근 국회 법사위원회를 헌법재판소에 제소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국회가 그간 제출된 사시존치 개정안의 심의를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존치를 하건 폐지를 하건, 그 결론은 치열한 국회의 토론을 거쳐야 하건만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아무 일도 안 하는 불량, 무능 국회의 모습이 이 부분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법무부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 85.4%가 사시존치에 찬성했죠. 저도 사시의 존치에 찬성합니다. 로스쿨 졸업생들이 치르는 변호사시험 수준도 논란이 되었습니다만 로스쿨을 꼭 나와야 법조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돈 드는 교육을 더욱 심화시켜 여기에 못 가는 사람들의 공무담당권을 빼앗는 것이죠. 학부에서 다양한 전공자가 로스쿨로 들어가는 것도 좋지만 비싼 학비를 낼 수 있는 부자계층으로 변호사시험 자격을 국한하면 이들이 누린 기득권의 세습을 조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시는 노력하면 출세한다는 성공의 스토리이자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사다리였습니다. 이 사회가 점점 활력을 잃어가는 원인은 이렇게 처지가 어려운 국외자들의 '높이뛰기'를 어렵게 만드는 현실에 있습니다. 자신들은 희망의 사다리로 높은 자리에 올라갔으면서도 옛날의 자신을 잊어버리고 남이 못 올라가게 그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꼴입니다. 서민을 잘 알고 대변하는 법조인을 키우는 것도 법조인 양성의 중요한 국가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필자소개 : 김영환

한국일보, 서울경제 근무. 동유럽 민주화 혁명기에 파리특파원. 과학부, 뉴미디어부, 인터넷부 부장등 역임. 우리사회의 개량이 글쓰기의 큰 목표. 편역서 '순교자의 꽃들.현 자유기고가.

 

편집국 (c1221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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