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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날짜 [ 2016년01월04일 07시41분 ]


새해 첫글을 씁니다
. 마치 한 해의 첫 파종을 하는 농부의 마음으로 올해의 글 씨를 뿌립니다. ‘2016년 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정갈한 아침 기도도 올렸습니다. 올해도 큰 변동이 없다면 한 해를 글로 열고 글로 닫게 될 것입니다. 한 달 한 달이 글로 새고 글로 저물며, 하루의 일과가 글로 시작 되고 글로 마감될 것입니다.

   

쌀농사를 지으려면 88번의 손길을 거쳐야 한다지요. ()’ 자를 풀면 팔십팔(八十八)이니, 88세를 일컫는 미수(米壽)에 쌀 자를 쓰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쌀 농사를 지을 때 매년 들어가는 88번의 정성을 88년 동안 드렸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천수에 해당하는 88성상을 지나며 결코 녹록했을 리 없는 삶의 애면글면쌀 미자로 형상화, 상징화한 것에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정성과 수고의 은유가 담긴 쌀 미자에 빗대어 제가 짓는 글 농사를 생각해 봅니다. 매 글마다 88번을 만지고, 다듬고, 돌아보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시나브로 농부의 마음을 닮아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감히 농심을 안다고 말하는 자체가 불경스럽다면, 농심 가운데 적어도 정직은 배우고 있다고 바꿔 말하겠습니다. 한 해의 소출을 얻기 위해 1년 내내 정직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농심처럼, 글을 밥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글 쓰는 자세와 태도에서 정직하고 착하지 않을 수 없기에 말입니다.

 

정직하고 착하다는 말은 천심을 떠오르게 합니다. ‘농심은 천심이라는 말도 그래서 생겼을 겁니다. 또한 천심이 베풀어주지 않으면 제 아무리 애를 써도 쭉정이 밖에 쥘 것이 없다는 뜻도 담았을 것입니다. 세상 다른 일에 비해 농삿일이란 특별히 하늘 과 하늘 연줄이 닿아야만 풀린다는 함의로도 들립니다. 무엇보다 그 말에는 한 그릇이상, ‘일용할 양식이상을 요구하면 그마저 빼앗을 것 같은 엄중함과, 동시에 들의 꽃도 입히고 공중 나는 새도 먹이시는 기독교 하나님의 자상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농심이 천심이라는 말은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허기심 실기복(虛其心 實其腹)’과도 닿아있습니다. 욕심과 현혹으로 어지러워진 마음을 비우고 다만 배를 채우라는 노자의 지혜가, 더구나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오직 배채우라는 가르침으로 제게는 다가옵니다. 글을 통해 허기진 배 대신 영예나 인정 욕구 등 허기진 마음을 채우려는 순간, 천심이 저를 저버릴 것 같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글심'은 천심인 것입니다.

   

저처럼 글 밥먹는 사람 중 하나인 시인 함민복의 긍정적인 밥은 제가 좋아하는 시입니다.

   

()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이 시는 약 15년 전에 발간된 그의 시집에 들어 있으니 긍정적인 밥은 그 전에 쓰여졌을 것입니다.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글을 써서 받는 돈은 들인 공에 비해 박하고, 헐합니다. ‘대한민국에서 보기 드물게 시 쓰는 것 말고 다른 직업이 없는 전업시인이라는 함 시인과 저의 직업이 '전업 글쟁이'로서 동일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함 시인도, 저도 '배를 채우기' 위해 올 한 해 부지런히 글 농사를 지어야할 것입니다. 함 시인은 어떨지 또 모르긴 몰라도 저는 오직 배채우겠습니다.

  
제 주먹크기만 한 위장을 채우기 위해 정직한 글의 씨앗을 오늘 뿌렸습니다. 부디 천심이 저를 버리지 않아 제 글이 제 배를 채울 수 있기를, 오직 제 배만 채울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 '글심은 천심'이라고 다짐하듯 되뇌이면서.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필자소개 : 신아연

이화여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호주에서 21년을 살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호주동아일보와 호주한국일보를 거쳐, 중앙일보, 여성중앙, 자생한방병원, 메인 에이지 등에 글을 썼거나 쓰고 있다. 20161월에 나온 인문 에세이집 내 안에 개 있다를 비롯해서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자식으로 산다는 것(공저)5권의 책을 냈다.

블로그: 스스로 바로 서야지, 세워져서는 안 된다 http://blog.naver.com/jinwonkyuwon

이메일: shinayou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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