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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날짜 [ 2016년01월07일 05시50분 ]

오래전에 읽은 책 중에 <How to become a great boss>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 중, ‘모든 이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라는 단락에 쓰여 있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저자의 지인은 대형 로펌의 대표인데 골치 아픈 살인 사건을 맡게 되었습니다. 의뢰인의 자녀가 용의자인데 도무지 어떻게 변론을 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건물 계단에서 청소를 하던 아주머니와 안부를 나누다가 자신이 맡은 사건 얘기까지 하게 되었고 이때, 중요한 조언을 듣게 됩니다.

 

 

약이에요. 약이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을 거예요.”

 

 

이 사건에 대한 재판 결과는 모든 이의 말을 경청하는 습관을 가진 훌륭한 변호사의 노력 덕에 로펌에게 승리를 안겨 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작가는 경청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려고 예를 든 것이지만 필자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어 가려고 이런 부도덕한 승리의 이야기가 버젓이 책에 쓰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의뢰인이 말하지도 않은 약물 복용을 이야기하면서 법의 심판을 피한다는 것이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당치도 않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허용치의 3배에 달하는 음주운전으로 4명의 목숨을 앗아간 십대 소년이 부자병(affluenza)’이라는 해괴한 병명으로 보호관찰 10년이라는 관대한 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백만장자 부모가 고용한 능력 있는 변호사와 이들에게 친절하게 진단서를 발급해준 의사의 도움이 컸을 겁니다. 재판에서 삶이 너무 풍요로워 감정을 통제할 수 없는 부자병을 앓고 있다고 호소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징역형 대신 보호관찰형을 내렸던 것입니다. 법원 역시 부자에 관대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남의 나라 이야기라서 별로 심각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만, 요즘은 이런 비슷한 일들이 우리나라에서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183명이나 되는 여성의 은밀한 곳을 몰래 촬영한 의학전문대학원생이 기소조차 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기소를 해야 재판을 받는데 검찰이 기소조차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피의자가 잘못을 반성하고 있고 우발적인 범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8개월 동안 지하철 역에서 행인들의 치마 속을 촬영하고, 촬영한 여성을 쫓아가 얼굴까지 몰래 촬영한 것이 어떻게 우발적인 범죄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피의자가 과학고등학교를 2년 만에 졸업하고 대통령 장학금을 받았으며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한 수재였기 때문에 검찰의 선처를 받은 것일까요? 아니면 그 정도의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집안의 배경이 좋아서 선처를 받은 것일까요? 죄를 지으면 벌을 주는 이유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그 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최소한의 위로를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이런 의전원생이 의사가 되어 환자를 진료한다면, 물론 그렇게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만, 개 버릇 남 주지 못하고 못된 행동을 또 하지 말란 법이 없을 겁니다.

 

 

문제는 이런 비슷한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환자의 몸을 몰래 찍었다가 의사라는 이유로 신상공개를 면한 경우와 데이트 중에 여자친구를 감금하고 폭행한 의전원생에게 벌금형을 선고한 것 등등 엄정한 잣대가 더 필요한 의사 또는 의전원생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판결을 내린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습니다. 같은 자 돌림이라서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일까요?

 

 

법은 상식과 다릅니다.” 송사(訟事)를 경험한 사람들이 변호사를 찾으면 가장 먼저 듣는 얘기 중 하나입니다. 법리에 따라 판결한다는 얘기는 상식에 따른 판단이 아닌 전문적 법 지식과 절차, 그리고 형식의 논리에 따라 판결한다는 얘기입니다. 재판이 상식대로 결론이 난다면 변호사들은 돈을 벌 길이 없어지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만의 언어와 논리를 만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의전원생이 아니라 일정한 직업이 없고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젊은이가 183명이나 되는 여성의 신체 일부를 몰래 촬영했다면 그때도 기소유예를 해줄까요? 법을 대표하는 상징물인 정의의 여신상은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이는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평무사한 자세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최근의 판결 중에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판결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학부모 두 명에게서 반년 동안 460만 원의 촌지를 받은 교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입니다. 촌지를 준 학부모들은 아이가 숙제를 못 했다고 혼내지 말아달라’, ‘상장 수여식에서 차별하지 말아달라’, ‘생활기록부를 좋게 기재해달라’, ‘공부 못한다고 공개 망신주지 말고 칭찬해달라고 구체적으로 부탁했다는데, 재판부는 학부모들의 청탁 내용은 피고인이 교사 직무권한 범위에서 자녀를 신경 써서 잘 보살펴달라는 취지라며 통상 초등생 자녀를 가진 부모로서 선생님에게 부탁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 사회상규에 어긋나거나 위법하게 또는 부당하게 처리해 달라고 부탁한 사정은 보이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물론 학부모의 부탁은 사회상규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460만 원이나 되는 촌지가 사회상규에 맞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재판부의 판단은 금품과 관련한 부당한 이득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일견 맞는 말입니다. 재판부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합당한 판결을 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동네 아주머니들도 다 아는 초등학교 촌지의 속사정을 재판부가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숨이 나옵니다. 얽히고설킨 사립학교의 촌지문제에 대한 얘기는 논외로 하더라도, 이 사건으로 사람들은 ‘460만 원의 촌지를 받아도 별문제가 되지 않는구나라는 사실만 기억할 겁니다. 더 나아가서 460만 원 정도의 촌지를 줄 형편이 되지 않으면 자녀를 사립초등학교에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도 등장할 것입니다.

 

 

법리와 상식은 같아야 합니다. 만약에 이 둘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면 반드시 바로 잡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 둘의 간극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서민들은 그 틈을 비싼 수임료로 메워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간극을 이용해서 잘못을 하고도 여전히 잘 먹고 잘 사는 사회가 될 테니 말입니다. 사법부가 가만히 있으면 입법부라도 나서야 합니다. 삼권분립은 견제와 균형을 위해 만든 원칙입니다. 법률을 만드는 국회가 그동안 쌓인 불합리한 판결과 적폐들을 찾아내서 이를 보완하는 입법을 통해 국민과 법의 권위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견제와 균형이 선순환되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국민의 현명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검사와 판사는 국민이 선출할 수 없지만 국회의원은 국민이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필자소개 : 박상도

SBS 아나운서. 보성고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TV 토요일 아침 '모닝와이드' 담당.

 

편집국 (c1221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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