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이세돌 선수가 어제 구글의 슈퍼 인공지능인 알파고(AlphaGo)와의 대국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연달아 세 판을 내준 뒤에 일궈낸 제4국에서의 빛나는 승리입니다. 인공지능의 위력이 이미 대단한 경지에 오른 것이 사싫이라고 해도 끝까지 투지를 불사르며 대국에 임한 결과입니다. 이세돌이 세계 바둑 최고수로서, '인류 대표'로서의 위치를 스스로 증명해 보인 셈입니다. 당연히 축하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번 구글 딥마인드 챌리지 매치를 통해 바둑에서도 인공지능의 명백한 우위가 확인됐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자기 손으로 만든 피조물과의 대결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설마 하던 일이 눈앞에 현실로 벌어지는 상황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어제 대국에서도 이세돌이 잘 두기도 했지만 알파고의 완착이 이어진 때문에 승부가 갈렸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공지능이 일찌감치 체스에서 사람을 넘어섰지만 바둑에서만큼은 아직도 최소한 10년 정도는 뒤떨어져 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알파고가 다섯 달 전 유럽선수권자인 판후이(樊麾)를 5대0으로 물리쳤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대부분 남의 일처럼 흘려들었던 이유입니다. 판후이의 실력을 이세돌에 비교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고, 그만큼 이세돌의 절대적인 승리를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세돌 역시 이번 ‘세기의 대결’에서 당초 5승 전승을 장담했을 정도로 낙관적이었습니다. 첫 대국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 판 정도는 질지도 모르겠다”며 짐짓 한걸음 물러서기는 했지만 승리에 대한 확신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인공지능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전망이 팽팽하게 엇갈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반적으로는 이세돌의 상대적인 우위를 점치는 분위기가 대세였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대였다고도 여겨집니다. 더구나 바둑이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고차원적인 ‘두뇌 게임’이라는 점에서 바둑마저 인공지능에게 내줄 수 없다는 은근한 자존심이 작용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요. 바둑을 풀어나가는 데는 직관과 감각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언젠가는 인공지능이 바둑에서도 사람을 능가하는 때가 오기는 하겠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세돌이 첫판을 불계로 내주면서부터 모든 사람들이 순식간에 충격과 공포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러다간 인간이 인공지능에 의해 지배당할 수 있다는 피해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사람에 따라서는 공상과학영화 터미너이터에 등장하는 스카이넷을 떠올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인간과의 전쟁으로 세상을 초토화시킨다는 미래 인공지능의 모습입니다.
물론 아직은 그런 상황까지 걱정할 단계는 아닙니다. 걱정한다고 지금의 인공지능 개발 경쟁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공지능을 잘만 활용한다면 우리 생활이 한결 편리해질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미 무인자동차를 비롯해 의약, 보건 등의 분야에서 인공지능이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부작용도 없지 않겠지만 계속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그런 경우를 최대한 예방하는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알파고 자체가 대단한 발명품입니다. 사람의 두뇌처럼 신경망 구조에 의해 나름대로 판단력과 직관력까지 갖추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미 3,000만 번의 대국 기보를 통해 학습이 이뤄졌다는 점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축적된 데이터베이스를 기초로 시행착오를 통해 최적의 전략을 찾아낸다는 것이니, ‘괴물’이라고 불릴 만도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스스로 진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사실이겠지요. 우리가 알파고를 얕잡아 봤을 뿐이지, 알파고는 이미 거의 모든 대국에서 이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세돌이 이러한 알파고의 실체를 제대로 느낀 것도 2국을 내준 다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1국에서 패배하고도 “해볼 만하다”던 의지가 상당히 꺾인 듯했습니다. 다음에 있을 3국에 대해서도 “어려울지 모르겠다”며 기자들의 질문에 난색을 표명했던 것입니다. 별다른 실수 없이 초반 우세를 보이며 끝내기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결국 돌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겠지요.
그가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연달아 세 차례 패한 뒤 “이세돌이 패한 것일 뿐 인간이 패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보도를 접하며 연민을 느꼈습니다. ‘인류 대표’로서 자신에게 쏠린 책임감을 통감한 발언이었겠지요. 속으로 울음을 참는 듯한 착잡한 표정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인공지능의 약점을 찾아가며 궁리를 했는데도 장벽을 뚫지 못한 것을 자신의 실력 부족으로 돌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세돌이 어떤 선수입니까.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단연 독보적인 프로기사가 아닙니까. 2002년 제15회 후지쓰배에서 처음으로 세계 타이틀을 차지했고, 이듬해 LG배 세계기왕전에서 당시 세계 1인자이던 이창호 9단을 꺾으면서 최고 자리에 올라선 이래 자기의 시대를 이어가는 주인공입니다. 2년 전에는 중국 구리(古力) 선수와의 10번기에서도 6승2패로 간단히 물리친 전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별명 그대로 ‘쎈돌’입니다. 이번 승리로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가 시원하게 풀렸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흉내바둑을 둔다면 알파고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점입니다. 흑번으로 시작하는 경우 첫 수를 천원(天元), 즉 배꼽점에 둔 다음 상대방이 두는 수를 대칭점에 그대로 따라 두는 방법입니다. 바둑계에서 '영원한 기성(棋聖)'으로 칭송받는 우칭위안(吳淸源)도 초창기 시절 이같은 방법으로 기타니 미노루(木谷實)와 대국한 적이 있으며, 그 기보가 지금껏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마침 내일 대국이 이세돌의 흑번이므로 고려할 필요가 있겠으나, 아마 그런 방법보다는 정공법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겠지요.
우리는 이세돌을 응원합니다. 그가 인류의 자존심을 걸고 마지막까지 분발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 어차피 5번기의 승부는 이미 가려졌지만 나머지 한 판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설혹 수싸움에서 인공지능에 밀리는 경우라 해도 기계보다는 사람이 품위가 있고, 자긍심도 높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내일 대국에서도 마지막까지 흔들림없는 의연한 자세로 한 수, 한 수를 놓아 주도록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필자소개 :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전경련 근무. 경향신문과 한국일보에서 논설위원 역임. 미국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스쿨 방문연구원.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대만, 어디에 있는가', '영원한 도전자 정주영'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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