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풍경에서 정치인들의 행태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 애써도 부지불식간에 잡상(雜像)들이 우리네 시·청각 신경계를 흔들어놓고 맙니다. 무엇보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공인임을 자칭하는 국회의원이나 정치인의 행동거지가 더 이상은 그냥 보고 넘기기 참으로 어려운 지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을 만들고 관리한다는 입법부인 국회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한 국회의원이 자기가 소속한 당 조직의 윗사람에게 “죽어버려”라는 막말을 퍼붓는 폭행도 예사롭지 아니한데, 언론에서 그것을 문제 삼자 당사자가 변명이랍시고 한 말이 더욱 놀랍습니다. ‘취중 실언’이니 이해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변명을 들어야 하다니, 우리 평시민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합니다.
게다가 그를 옹호하는 추종자는 “취중 실수이고 사적인 대화였다는 점에서……” 운운하며 너그러운 이해를 촉구하고 나섰습니다. 이는 마치 공인이 자기 소유의 자동차로 음주 운전을 하다가 치명적인 인명 사고를 내놓고는 “취중에 일어난 사적인 실수이니……”라고 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염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어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취중에 한 실언이니 관대한 용서를 구한다는 당사자의 의식 수준이나, 공인이지만 취중에 사적으로 저지른 사고이니 관대히 봐주자는 변호는 아주 낮은 단계의 윤리 수준과 동일 선상에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 전 “검찰총장은 음주운전 사망 사고를 살인죄에 준해 처벌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는데”(YTN, 2016.03.13.)라는 내용이 버젓이 기삿거리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취중 운전 사망 사고’를 저질렀어도 신분에 따라 ‘취중’이라는 상황을 너그러이 참작해왔다는 검찰총장의 자백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취중 막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정서를 읽는 것 같아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감성적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 11세 때 영국으로 유학 가서 명문 옥스퍼드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는 한국 여학생에 대한 어느 매체의 인터뷰 기사에서 필자는 우리 사회에 많은 것을 시사하는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여학생은 인터뷰에서 다채로운 성장 과정을 언급하며 가장 어려운 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A-Level에서는 라틴어, 불어, 역사, 수학을 공부했어요. 이때 선생님들께 지적받은 부분이 바로 논거(Argument)가 약하다는 점이었죠. 그건 따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몸에 배는 것이죠.” 이는 우리가 유심히 꼭꼭 씹어봐야 할 대목입니다. 바로 논리적 사고력에 부족함이 있었다는 얘깁니다. 필자 또한 독일에서 보낸 의예과 시절, 실습 리포트를 작성하며 가장 큰 어려움을 느꼈던 부분입니다. 게다가 지도교수가 그걸 지적했다는 것도 너무나 똑같아 더욱더 실감이 났습니다.
우리 사회는 매서운 주장은 있어도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설득하며 문제 해결에 접근하려는 정서가 서양 문화권에 비해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 교육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대부분 시험에서 아직도 Multiple Choice(정답 고르기)나 O·X식으로 답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많은 우려를 자아냅니다. 이는 결과만 중시하고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 즉 논리적 접근(Process)을 가벼이 여기는 현상으로 이어져 ‘결과우선주의’가 사회에 만연한 근본 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가 비논리적 정서에 매몰되어 있는 가운데, 지극히 경계해야 할 ‘감정이 지배하는 사회’로 이미 깊숙이 진입한 것은 아닌가 싶어 걱정이 앞섭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일국의 국회의원이 ‘취중에 한 실수’라고 태연하게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우울해집니다. 굳이 독일 속담 “술에 취한 자들과 어린아이들은 진실을 말한다(Betrunkene und Kinder sagen die Wahrheit)”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가 이른바 공인의 ‘취중 실수’를 어떻게 처리할지 지켜볼 일입니다.
아울러 지금이라도 우리 사회가 논리보다 감성이 횡행하는 사회를 넘어 좀 더 이성적인 사회로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열망하는 일류 국가로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필자소개 :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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