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멍청하고 무식하다고 미국인들이 놀리며 비웃던 사람입니다. 하도 말실수가 잦고 어휘력과 문법에 문제가 많아 그의 엉터리 어법을 뜻하는 ‘부시즘(Bushism)’이라는 조어가 생겼을 정도입니다.
그는 “사담 후세인에 의해 손이 잘린 용감한 이라크 국민의 손을 잡고 악수하게 돼 영광”이라는 해괴한 말을 한 바 있습니다. 영국 어린이가 “백악관은 어때요?” 하고 묻자 “하얗지”라고 하고, 유치원에 가서는 책을 거꾸로 들고 있기도 했습니다. 2007년 호주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 때는 APEC을 OPEC이라고 하더니 “오스트리아에 고맙다”고 엉뚱한 나라에 인사를 하고, 수도 캔버라를 캘베라라고 불렀습니다.
이러니 갖가지 농담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1)조지 워싱턴, 리처드 닉슨, 조지 W 부시의 차이는? “워싱턴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고 닉슨은 진실을 말할 줄 모르고 부시는 거짓과 진실의 차이를 모른다.” 2)가가린과 암스트롱과 부시가 만났다. 가가린 “나는 우주에 맨 처음 갔다 온 사람이여.” 암스트롱 “달은 내가 최초지.” 할 말이 없는 부시, “난 맨 먼저 태양에 갈 거야.” 가가린+암스트롱 “바보야, 거기 갔다간 뜨거워서 타 죽어.” 그러자 부시 왈, “그럼 밤에 가지 뭐.”
미국인들은 그를 비웃으면서도 실수를 연발하는 인간적 면모를 좋아하고 재미있어 했습니다. 그런데 부시는 사실 재임 중 많은 책을 읽은 다독가라고 합니다.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 리처드 코언은 ‘부시 책 목록 읽기’라는 글에서 칼 로브 전 백악관 부실장의 말을 인용해 부시가 2006년 95권, 2007년 51권, 2008년 40권을 독파했다고 썼습니다. 둘이서 벌인 책 읽기 경쟁에서는 로브가 이겼지만, 부시는 항상 책을 옆에 두고 있었으며 전기와 역사서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의 글과 어법, 독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미국의 카네기멜런대 언어기술연구소가 지난 16일 내놓은 보고서는 그런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이번 미국 대선 주요 후보들의 언어능력과 함께 일부 전·현직 대통령 연설문의 어휘와 문법 수준을 분석한 조사 결과, 문법 수준이 가장 높았던 대통령은 11학년(우리의 고 2) 수준인 에이브러햄 링컨이었습니다.
어휘에서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11학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10학년 수준이었습니다. 부시 전 대통령은 문법이 초등 5학년 수준이지만, 어휘 수준은 10학년이었습니다. 절대 무식한 바보가 아니라는 거지요. 정말로 무식하고 무모해 보이는 도널드 트럼프의 문법은 초등 5∼6학년, 어휘는 중 1∼2학년 수준으로 대선 후보들 가운데 가장 낮았습니다.
우리나라로 눈을 돌려 봅니다. 역대 대통령의 문법과 어휘 수준에 관한 조사·연구를 한다면 수준이 낮은 경우가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문(非文)은 이미 정평이 났지만, 박근혜 대통령도 만만치 않습니다. “군 생활이야말로 사회생활을 하거나 앞으로 군 생활을 할 때 가장 큰 자산이라는...”(2013.12.24. 군부대 방문.) “그게 무슨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우리의 핵심 목표는 올해 달성해야 될 것은 이것이다 하는 것을 정신을 차리고 나가면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걸 해낼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셔야 될 거라고 생각한다.”(2015.05.12. 국무회의.) 등등.
주어와 술어가 맞지 않고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걱정스러운 것은 공격적인 어휘, 배려가 부족한 언어입니다. 없애야 할 규제를 강조하느라 원수, 암 덩어리, 단두대 등으로 점점 수위를 높여온 박 대통령은 올해 2월 17일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는 “신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규제로 의심되면 일단 모두 물에 빠뜨려놓고 꼭 살려내야만 할 규제만 살려두도록...”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월호 사고에 대한 국민과 유족의 아픔, 정신적 상처를 조금이라도 배려했더라면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최악의 화법입니다.
정부는 박 대통령의 취임 3주년을 앞두고 어록 모음집 ‘사람 나고 법 났지, 법 나고 사람 났나요’를 발간했습니다. 간결하고 함축적이면서 분명한 박 대통령 어법의 장점이 잘 드러난 발언을 모은 책입니다. 참여정부 시절 발간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어록집 ‘노무현 따라잡기’와 달리 정부 최초로 ‘비유집’을 냈다는 게 큰 특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비유가 국민들의 마음을 얻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메시지가 명확하더라도 알아듣기 쉽고 정과 배려가 담긴 언어라야만 호소력이 생깁니다. 문법 수준이 높은 링컨 전 대통령이 어휘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평이한 중 3 수준이었다는 점은 아주 시사적입니다. 카네기멜런대 연구소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 등장하는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의 문법 수준을 어느 누구도 뛰어넘지 못한다고 평가했습니다.
17~20일 열린 파리도서전의 개막식에 참석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2시간 넘게 머무르며 출판인들과 대화를 했습니다. 문화부 장관은 이틀 간격으로 들렀고, 총리와 산업경제부 장관, 해외영토부 장관 등도 다녀갔다고 합니다. 우리의 경우는 서울국제도서전에 대통령은커녕 주무 부서인 문화부 장관도 오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문화융성을 부르짖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이 이해하기 어렵고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91)은 은퇴 이후 28권의 책을 냈고, 79세에 쓴 역사소설은 퓰리처상 후보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대통령들은 책을 읽지 않는 걸까요? 왜 대통령의 연설과 방명록의 메시지에 명문이 없고 감동이 없는 걸까요? 그리고 왜 대통령을 우스갯거리로 삼는 친근한 농담도 나오지 않는지, 대통령 자신은 물론 보좌하는 사람들 모두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통령이 우스갯소리에 등장할 수 있어야 문화융성이 된다고 믿습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필자소개 :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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