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에 가로세로 칸막이가 많으면 여러모로 편리합니다. 책의 성격이나 크기대로 구분해 정리하고 보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칸막이에 막혀서 넣을 수 없는 책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때면 무조건 칸막이가 많아서 좋은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서울 지하철엔 날이 갈수록 칸막이가 늘어갑니다. ‘교통약자’를 위한 배려라고 합니다. 처음엔 각 차량 양쪽 끝부분에 노약자를 위한 좌석이라고 표시가 붙어 있었습니다. 차 안이 아무리 붐벼도 젊은 사람들은 아예 거기에 앉아볼 염도 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차량 한복판 일곱 개의 좌석에 또 노약자 표시가 붙었습니다. 노인, 몸이 불편한 사람, 임산부 등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보호받을 만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석입니다.
그러나 이번엔 사정이 좀 달라졌습니다. 복잡한 찻간에서 그곳까지 노약자 좌석이라고 의식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 노약자석이 그렇게까지 확대되는 데 대해 의식적으로 반발하는 눈치도 없지 않습니다. 언제 보아도 그 일곱 좌석엔 전혀 노약자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다. 노인이나 병약한 사람이라고 그 좌석을 바라고 다가서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확대된 노약자석 일곱 자리 중에서도 양쪽 출입구 가까운 좌석은 핑크빛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내일의 주인’이 앉는 자리랍니다. 바꿔 말하자면 임신 여성을 위한 자리입니다. 갈수록 출산율이 떨어진다고 아우성이니 누군가 그런 깜찍한 아이디어를 낸 모양입니다. ‘내일의 주인공을 맞이하는 핑크카펫’, 자리 이름도 그럴싸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핑크빛 표식을 의식하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차 문이 열리자마자 먼저 들이닥친 사람이 잽싸게 차지할 뿐입니다. 언제 어느 차에서건 그 자리에 ‘미래의 주인’을 잉태한 여성이 앉은 모습은 본 적이 없습니다. 설령 임신부라 하더라도 아직 부르지도 않은 배를 내밀고 “그 자리가 내 자리요” 하고 앉을 새댁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런 염려는 말라는 듯 건장한 장정들이 주저 없이 그 자리를 꿰차고 앉은 모습은 숱하게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내일의 주인석’은 공연한 전시행정의 산물일 뿐입니다. 지켜지지도 않을 도덕률을 만들어 공연히 비도덕한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꼴입니다.
어느 날 노인과 젊은이, 두 사람이 무언가 긴밀히 대화를 나누며 함께 지하철에 올랐습니다. 마침 한가한 시간이어서 빈자리가 많았습니다. 노인이 노약자석에 앉으며 청년을 손짓해 불렀습니다. 청년이 화들짝 놀라며 “아휴, 제가 거기 어떻게 앉아요?” 하며 손사래 쳤습니다. 하는 수 없다는 듯 노인이 일반석의 청년 옆자리로 옮겨 앉았습니다. 노인은 “이거, 난 여기 앉아도 되나? 젊은이들 눈총받겠는데” 하며 연신 불안해했습니다.
어중간한 나이의 노인들에겐 노약자석도 일반석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겐 오히려 배려석이 가시방석입니다. 일반석에 다가서기도 눈치가 보입니다. 그래서 문간에 엉거주춤 섰다가 내리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됩니다.
옛날 버스나 전차 안에는 노약자 배려석 따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도 노인이나 몸이 불편해 보이는 사람이 오르면 젊은이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해주곤 했습니다. 노인들이 도리어 “공부하기도 힘들 텐데”하며 사양하기도 했습니다. 누구든 무거운 가방이나 짐을 들고 있으면 받아서 무릎에 올려놓아 주곤 했습니다. 책가방을 받아준 아주머니 치마에 잉크가 흘러 무안했던 일, 여학생 무릎에 올려놓았던 책가방 쇠고리가 교복치마에 구멍을 내 민망했던 일은 지금껏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요즘엔 꼬부랑 할머니가 올라와도 ‘이건 보장된 내 자리’라는 듯 꼼짝도 않는 젊은이들이 태반입니다. 노약자석이 따로 있으니 내 알 바 아니라는 것이지요. 거기 빈자리가 있건 없건 상관없습니다. 더러는 그 복잡한 찻간에서 뜨거운 커피를 홀짝거리고, 더러는 꼬아 앉은 다리를 뻗어 흔들며 앞에 선 사람 따윈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복잡한 지하철 찻간에 자꾸만 노약자석을 늘려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노약자석 표시를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오히려 자진해서 성큼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던 미덕이 이어지지 않았을까요. 지하철에 늘어가는 칸막이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마음의 칸막이를 만들어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를 배려하는 마음보다는 요리조리 규제를 피해 제 잇속만 차리는 마음보를 만들어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필자소개 :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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