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한 분이 바깥일을 보고 급히 사무실로 돌아오다 지갑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무실 코앞까지 택시를 타고 와서 분명 택시비까지 지불했는데 주머니 속에 있어야 할 지갑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지갑 안에는 신분증, 신용카드, 교통카드, 그리고 약간의 현금도 들어 있었답니다. 선배는 오히려 주위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듯 은행과 주민센터에 연락해 두면 별문제 없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값나가는 귀중품이 아니더라도 늘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물건, 손때 탄 물건이 없어지면 섭섭하기 마련입니다. 지갑, 휴대전화, 수첩, 하다못해 동전지갑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실에선 위로하려던 말이 빗나가 엉뚱한 세태 타령이 이어졌습니다. 요즘엔 일부러 지갑을 흘려놓고선 이를 주워 돌려주려는 사람에게 돈이 없어졌다고 뒤집어씌운다더라. 남의 지갑을 주워서 현금만 쏙 빼 가고 지갑은 쓰레기통에 던진다더라. 공항에서 노인네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다가 마약 운반책으로 몰린 사람도 있다더라.
말도 안 되는 푸념을 늘어놓는데 뜻밖에 선배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지갑을 습득해 파출소에서 보관 중이니 찾아가라는 연락이었습니다. 한참 후 지갑을 되찾아 돌아온 선배의 얼굴이 환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네. 신분증, 카드, 현금이 고스란히 그대로야.”
“어디, 택시 안에다 빠뜨리신 건가요?”
“어, 택시 기사가 파출소에 맡겨 두었대.”
“참 착한 기사네요.”
“그러게. 파출소에 지갑을 맡긴 사람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어서 사례하고 싶다고 전화했더니 펄쩍 뛰면서 사양하더라구.”
“예전 일본에 다녀오면서 그런 미담을 많이 듣곤 했었지. 그런데 내가 우리 땅에서 그런 미담의 주인공을 만나다니.”
선배는 몸소 겪은 일인데도 믿어지지 않는 듯 감개무량한 표정이었습니다. 선배의 환해진 얼굴은 되찾은 지갑 덕이 아니라 택시기사의 아름다운 마음씨 덕분인 듯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아파트단지에서 이사 가려고 준비한 돈을 잃어버렸다가 쓰레기 분리하던 수위가 찾아 돌려주었다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외국인 관광객이 잃어버린 여행가방을 찾아 주었다는 이야기도 생각났습니다. 턱도 없는 세태 타령을 늘어놓은 일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우리 사회도 이만큼 밝고 깨끗해졌구나, 선배가 받은 감동이 서서히 전이되어 오는 기분이었습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1952~ ) 교수는 ‘신뢰’의 가치를 처음 경제학 개념으로 도입한 교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경제활동의 대부분이 신뢰를 바탕으로 일어난다고 설명했습니다. 개념의 폭을 넓히면 사회활동의 기반이 곧 신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한 사람이 가지는 신뢰의 범위가 가족, 혈연 사이에 그치면 ‘저신뢰사회’, 혈연을 넘어 공통관심사를 가진 공동체에 두루 미치면 ‘고신뢰사회’라고 규정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후쿠시마는 1995년 저신뢰사회의 대표적인 국가로 중국, 이탈리아, 프랑스와 한국을 지목했습니다.
2014년 영국 레가툼연구소(Legatum Institute)의 설문조사 결과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 최근 남을 도와준 적이 있는가? 2) 자신이 속한 사회의 대다수를 믿을 수 있는가? 두 질문에 가장 긍정적으로 답한 국가는 노르웨이, 뉴질랜드, 덴마크 순이었습니다. 한국은 69위. 대부분의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는 응답자가 노르웨이는 74.2%, 한국은 25.8%였다고 합니다.
한 국가의 사회적 신뢰도가 10% 상승하면 경제성장률은 8% 증가한다고 합니다.(2012년도 세계은행 보고서) 신뢰도가 낮은 사회의 특징은 거래비용이 높고, 기업 투자가 미약하고, 사회적 갈등이 많고,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사회적 비용이 높아 더 큰 발전을 이루기 어렵게 됩니다. 후쿠야마는 신뢰의 바탕이 없다면 어느 정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해도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고신뢰사회에 비해 저신뢰사회가 치러야 할 비용이 상상할 수 없이 크기 때문이랍니다.
2016년 오늘 우리 사회는 후쿠야마, 레가툼의 진단과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요? 택시기사의 선행에서, 아파트 수위의 미담에서 달라져 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느끼게 됩니다. 냇물에 떠내려온 꽃잎으로 봄이 옴을 느끼듯. 일부 정치꾼들, 선동가들의 갈등 조장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착실히 선진국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세계의 경제 여건이 어려울수록 우리 사회의 신뢰도를 높임으로써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경제선진국, 문화선진국의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져 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필자소개 :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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