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은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지 619돌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일부에서는 대왕 탄신을 기리는 행사도 있었습니다만 마침 일요일과 겹쳐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그저께 세종대왕이 태어난 통의동을 지나갔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준수방(俊秀坊)이라고 기록된 곳입니다. 고증을 거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하문로 인도에 이 부근이 ‘세종대왕 나신 곳’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표지석 옆에 대왕의 말씀을 몇 가지 적어 두었습니다. 그중에서 “큰일을 당하여 너무 두려워해 술렁거릴 것도 없고, 또한 두려워하지 않아 방비를 잊어서도 안 되는 것이니 이 두 가지를 요량하여 알맞게 처리하라.”(세종 31년 9월2일 칙사 영접례, 군사 상제, 변란시의 방비책 등에 대해 논의하다)는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국난 같은 변고를 당하더라도 허둥대지 말고 차분하게 대응하며, 또 일을 얕잡아 보고 대비하지 않아 변을 당하지 말고 미리미리 대비하라는 말입니다.
세종의 이 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세종은 집권 25년 섣달 그믐날, 중국과 왕래가 일시 단절되는 시기에 우리만의 독특한 음소 28개를 찾아냈다고 공포했습니다. 글자 훈민정음입니다. 다음 날인 정월 초하루 매년 해 오던, 중국 황제에게 인사하던 망궐례(望闕禮)를 세자에게 대행시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참석치 않습니다.
그리고 6개월 뒤 조세제도를 연분(年分) 6등, 전분(田分) 9등으로 전면 개편합니다. 해마다 흉년과 풍년에 따라 6단계로, 수리와 비옥도 등 논의 상태에 따라 9단계로 나누어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지요. 쉽게 계산해도 54단계의 차등 조세징수제도를 실행했습니다. ‘어제(御製 왕이 만든) 훈민정음’에서 밝힌 것처럼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푸는 정치를 시행한 것입니다. 이보다 1년 앞서서는 중국을 능가한다는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정하는 혼천의도 만들었습니다.
세종의 그런 통치는 지금도 계속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 뜻으로 한국은행은 1만 원짜리 지폐 앞면에는 세종의 숭고한 뜻을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백성을 위해 만든 세계 최고의 글자인 훈민정음을 이용하여, 최초로 창작한 용비어천가 2장을 실었습니다. 현대어로 해석하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꽃이 좋고 열매가 많이 달린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않고 내를 이뤄 바다로 간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뒷면에는 혼천의를 올렸습니다.
이때만 해도 1만 원권은 화폐의 여러 기능을 제대로 하는 것 같았습니다. 대학교 1학년 경제학개론 시간에 담당 교수는 “돈은 돌아야 돈”이라면서 “인체로 치면 혈액과 같아 많아도, 적어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5 만 원권이 나오면서 사정이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그마한 혈전이 생기더니, 그것이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돈이 스스로 '무거워지고 세지는' 돈하면 안 된다"는 경고였는데,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 걱정이 커집니다. 아니 선량한 일반 서민에게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기까지 합니다. 언제 혈관이 막혀 죽을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지난달 우리나라 화폐발행액의 77.8%가 5 만 원권입니다. 그 화폐가 유통되는 비율(실제 자료가 없어 담당자가 일러준 자료에서 계산함)이 겨우 30%대 초반입니다. 2015년 1월에는 17.6%까지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묘하게도 2016년 들어서는 이 돈이 돈하지 않고 잘 유통되고 있습니다. 기현상입니다. 1월에는 33.2%이던 것이 2월에는 40.1%로 껑충 뛰었고, 3월에는 더 올라 45.1%, 4월에는 55.6%가 유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를 우리 서민들은 정말 잘 압니다. 지난 4월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한국 은행권에 발은 달렸어도, 추적할 지피에스(GPS)는 없습니다. 자동차에는 내비게이션과 블랙박스가 흔하게 달렸는데도, 우리나라 은행권 특히 5 만 원권에는 없습니다. 5 만 원권의 유통 궤적을 투명하게 보여줄 방법이 꼭 필요한데,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정부, 국회 등 누구도 나서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장 나쁜 경우로, 한국은행이 발행한 화폐 총액의 60% 가량이 유통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지하로 스며들어 세금을 징수할 수 없습니다. 심각하게 말한다면 범죄에 관련되었거나 탈세에 이용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엄청난 거액이 마늘밭에 묻혀 있었고, H백화점 물류창고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이런 폐해를 막기 위한 방법은 많습니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스웨덴에서는 화폐 자체를 없애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탈세를 막기 위해 이미 모든 주류(酒類) 거래를 카드로 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삼아 국민들이 20대 국회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필자소개 : 신현덕
서울대학교, 서독 Georg-August-Universitaet,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몽골 국립아카데미에서 수업. 몽골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 방어. 국민일보 국제문제대기자, 한국산업기술대학교 교수, 경인방송 사장 역임. 현재는 국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독은 독일보다 더 크다, 아내를 빌려 주는 나라, 몽골 풍속기, 몽골, 가장 간편한 글쓰기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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