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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날짜 [ 2016년06월23일 09시35분 ]

28세가 되면서부터 홀로 여행을 다니는 때가 많아졌습니다. 그때부터 회사 출장으로 유럽에 갈 때마다 업무가 끝나면 시간을 내어 이곳저곳 대도시를 떠나 지방 도시를 돌아다녔습니다. 인적이 드문 시골길에서 각 국가의 특성과 시민들의 정서를 느낄 수 있어 기차여행을 많이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언젠가부터 사람들과 몰려다니는 여행이 불편해졌고 업무를 위한 재충전과 사색할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이 편안했습니다.

 

그동안 모국을 방문할 때마다 찾아다녔던 곳이 아름다운 강, 사찰, 조상이 물려준 한국의 전통과 자연미가 아직도 살아있는 한적한 곳들로 정말 행복했었습니다. 다리가 성치 못해 장시간 걷는 것이 불편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꼭 제주 올레길을 걸어보리란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람을 접었습니다. 제주 올레길에서 홀로 걷던 여성을 죽인 후 난도질하여 그 여성의 손이 제주 어느 버스 정류장에 버려졌다는 기사를 본 이후부터입니다.

 

한국의 남녀 두 지인과의 대화에서 나는 인구비례와 국가의 크기에 비해 한국처럼 살인이 많은 나라가 드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만 그들은 한국의 치안이 너무 좋고 아주 안전하다고 대꾸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안전 불감증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한국은 지방 곳곳에 CCTV를 설치하고 캐나다나 유럽에 비하여 경찰의 치안 업무도 성실해 보입니다. 언젠가 언니와 함께 강원 경북 내륙지방을 차로 달리며 보니 시골 농가 동네까지 CCTV를 설치해놓았습니다. 사실 나는 그런 행정이 의아했습니다. 평화로워야 할 시골 동네에 CCTV가 웬 말인가. 얼마나 범죄가 기승을 부리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가. 유럽의 시골, 일본의 시골, 미국의 시골 동네에서도 보기 드문 풍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곳 캐나다에서 팔리는 자동차에는 블랙박스도 설치되지 않습니다.

 

스물세 살의 꽃다운 여성이 강남의 어느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살해당한 사건은 나를 많이 놀라게 했고 슬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경악하지 않았던 것은 한국의 여성들이 성 폭력 위험에 혹은 죽임을 당하는 것에 노출된 상황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비리와 폭력을 고발하지 않고 쉬쉬하는 풍토, 여성을 아직도 비하하거나 하대하는 전근대적인 사고를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것은 부모들도 포함), 아직까지도 남녀 공용 화장실을 쓰는 영업체와 지체장애인 용 화장실도 없는 식당에 허가를 내 준 후진적 행정이 태반인 관공서, 밤늦게까지 흥청거리는 많은 술집들과 유흥업소가 즐비한 도시, 남녀 막론하고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문화에서 그런 사건이 벌어지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요. 음주와 사교문화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지나친 것이 문제인데 다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의 음주량은 세계 제일이 아닌가 싶어 불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강남역 추모 현장에서 벌어진 남혐, 여혐 논란의 추태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어려운 장면이었습니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용의자 남성의 문제를 남녀 불평등에 관한 문제로 확대해석하고 선량한 남성들까지 죄인처럼 닦달하는 것도 문제이고 자제해야겠지만 순박했던 한국 사회가 성폭력이나 생명을 위협받는 국가로 변해버린 것처럼 보여 그 심각성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신안군 섬에 발령받은 초등학교 여교사를 학부모와 동네사람들이 성폭행한 것, 사패산, 수락산에 등산하던 50대 여성들이 등산길에서 살해된 사건, 80세가 된 할머니를 성폭행했다는 기사에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밤늦은 시간이 아니라 대낮에도 이런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요즘 미국 대학 내에서도 성 폭행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는 소식입니다. 특히 명문 아이비 리그 대학 내에서의 성폭력 사건이 상위 10위에 든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고려대학 남학생들이 단체 카톡방에서 동문 여학생들을 성적 대상화하여 성폭행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건으로 시끄럽다고 합니다. 어디 고려대학뿐이겠습니까? 빙산의 일각일 것입니다.

2016615일 조선일보의 한 언론인의 칼럼에 실린 기사를 읽어보면 '그래도 서울의 밤길은 걸을 만하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필자 자신은 '오늘 저녁 서울의 밤길을 혼자라도 걸어야겠다.' 라는 글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 칼럼에 의하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한국은 안전한 곳이라는 찬사가 많은데, 그 이유는 전 세계에서 늦은 밤에도 대도시를 활보할 수 있는 곳이 한국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안전하다는 말인데요, 외국인 방문객들은 피상적인 것만 보고 느끼는 것이지 한국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범죄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언론인이 쓴 글에서는 매우 중요한 점이 간과되어 있습니다. 뒤숭숭한 상황에 긍정적인 글을 쓰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마치 밤길 걷기를 찬양하는 것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필자 자신이 남성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시이건 시골이건, 밤이든 낮이든 한적한 곳에서 불안감 없이 편히 활보할 수 있는 사람은 남성들이지 여성이 아닌 것을 설마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몇 개월 자유칼럼을 쓰지 않고 있었을 때 가장 행복했던 것은 모국의 뉴스를 매일 읽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국의 신문이나 방송을 접하지 않고서는 칼럼을 쓸 수가 없는데, 작은 땅덩어리인 한국에서 거의 매일 등장하는 기사가 살인 사건, 성폭행, 패륜 기사와 추하기 그지없는 정쟁입니다. 오죽하면 재작년부터 신문에 기사화된 살인, 성폭행 횟수를 기록하다가 도중에 그만둔 것은 나 스스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병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캐나다는 시골뿐 아니라 토론토와 위성도시를 돌아다녀도 CCTV를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작은 소읍에도 없습니다. 어쩌면 캐나다가 살기 좋은 국가 5위 안에 드는 것이 이런 평화로움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미국처럼 총기를 맘대로 소유할 수 없고 소박하게 욕심 없이 살아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항상 모국을 그리워하며 살기에 자주 가고 싶지만 이젠 모국을 방문하는 것이 슬픈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대한민국 산천을 홀로 다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내리면 택시도 무서워 탈 수가 없습니다. 미국 엘에이 뉴욕처럼 대도시의 지역에 따라 밤길을 조심해야 하는 곳이 있지만 일본 싱가포르를 포함한 유럽지역은 그래도 안전했습니다. 심지어 동부유럽도 혼자서 겁 없이 다녔던 내게 이런 공포감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도 나이가 70~80세쯤 꼬부랑 할머니가 되면 모국에서의 여행이 덜 무섭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그조차도 두려운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건 비단 해외 교포인 나만의 얘기는 아닌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여성이 당면한 현실입니다. 이 사회적 구조와 모순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는 커다란 숙제이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잃어버린 수십 년 전의 한국 정서를 찾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필자소개 : 오마리

미국 패션스쿨 졸업, 미국 패션계에 디자이너로 종사.

현재 구름따라 떠돌며 구름사진 찍는 나그네.

 

편집국 (c1221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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