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1946년 <청록집>에 실린 목월(木月) 박영종(朴泳鍾,1916~1978)의 시 ‘나그네’입니다. 시집을 함께 만든 청록파 시인 지훈(芝薰) 조동탁(趙東卓,1920~1968)의 ‘완화삼’(玩花衫)에 대한 화답시(和答詩)인 ‘나그네’는 광복의 기쁨과 해방 정국의 혼란 속에서 뭇 사람의 영혼을 적시고, 가슴을 애잔하게 했던 서정시의 백미였습니다.
하지만 목월은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 찬가의 가사를 짓고, 육영수 여사의 가정교사 역과 전기 ‘육영수 여사’를 집필한 이유로 어용(御用)으로 몰리기도 했습니다. 시 자체도 비판대에 올랐습니다. 특히 ‘술 익는 마을’은 당시 초근목피로 목숨을 이어가는 수많은 삶에 대한 무지·외면·모욕이며 ‘문학 이름을 빌린 아편’이라고.
그런 시문학적 담론이나 비평에 필자가 감히 토를 달 자격은 없습니다. 다만 ‘구름에 달 가듯이’라는 대목은 과학적 합리적 표현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밤하늘 구름 사이로 달이 움직이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은 정지한 달 주변을 구름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사물을 보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름에 달 가듯이’는 ‘달에 구름 가듯이’라는 표현보다 몇 백, 몇 천 배 감흥을 줍니다. 시(詩)이기 때문에.
바람과 함께 떠도는 절망과 체념의 청년, 무엇인가 송두리째 잃은 듯한 상실감으로 허전해진 나그네의 발걸음은 구름에 달 가듯 하는 착각의 행보가 더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비슷한 착각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겪고 있습니다. 지하철을 타 보면 내가 탄 전동차가 정지해 있는데 맞은편에서 전동차가 들어오면 마치 내가 탄 차가 출발해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기차를 탔을 때 기차는 서 있고 차창 밖의 산천만 쏜살같이 지나가는 듯한 착각도 비슷한 현상입니다.
‘준거(準據)의 틀’(frame of reference)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달과 산을 고정시켜 두고 보면 분명 구름이 움직이고, 전동차와 시설물을 교차시켜 보면 맞은편 차가 움직입니다. 반대로 구름과 내가 탄 차로만 시각을 좁히면 착각이 생깁니다. 준거의 틀은 그래서 사물이나 현상을 사실 그대로 파악하는 데 중요한 관건입니다.
시각에만 착각이 있는 게 아닙니다. 생각과 말에도 전혀 상반된 반응이 나옵니다.
친구 사이인 세실과 모리스가 성당 미사에 가던 중 세실이 물었습니다.
“모리스, 자넨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된다고 생각하나?”
“글쎄 잘 모르겠는데, 신부님께 한번 여쭤 보는 게 어떨까?”
세실이 먼저 신부님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신부님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습니다.
“형제여,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엄숙한 대화인데, 절대 그럴 순 없지.”
그 이야기를 들은 모리스는 “그건 자네가 질문을 잘못했기 때문이야” 하고는 자신이 신부님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담배 피우는 중에는 기도를 하면 안 되나요?”
신부님은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형제여, 기도는 때와 장소가 필요 없네. 담배를 피우는 중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프레임의 법칙’에 나오는 한 예시입니다. 동일한 현상을 관점이나 생각의 틀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대생이 밤에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지만, 술집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낮에 대학을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한다고 하면 기특하다고 칭찬하는 것처럼.
신공항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밀양이다” “가덕도다”를 놓고 10년 간 쟁명을 거듭해온 신공항 유치 공방은 정치판의 표심 공략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경제성, 환경성, 안전성 등 합리적 잣대보다 지역이기, 집단이기를 앞세워 갈등만 부추겼습니다. 땅값 폭등에 기대를 부풀렸던 투기꾼들은 닭 쫓던 개꼴이 되었습니다. 정치권, 지역 주민 누구도 이득은 없고 민심만 갈라졌습니다.
핫바지(김종필 씨가 지칭한 충청도) 민심을 얻으려고 17대 대통령 선거 두 달 앞서 급조했던 세종시 공약은 막상 신도시 탄생 이후 온갖 문제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민의 아닌 정치권이 만든 수도 분할 부작용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정가는 세종시에 제2국회를 만들고, 청와대도 옮기자는 주장들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보통사람들의 욕구에 초점을 맞춘 백년대계가 아닌 그들만의 진영논리로 비칩니다.
개헌 논쟁은 어떤가요. 대통령 4년 중임제, 국회의원 중·대 선거구제, 주요 국책사업 국민투표제 같은 개헌 주장은 오래전부터 거론되어 온 과제입니다. 그러나 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국회가 왁시글거리기만 한다고 민생을 위한 법이 탄생할까요? 잡맛이나 독소를 없앤 반듯한 잣대를 만들지 않고서 말입니다.
특히 정치나 통치에서 준거의 틀은 민의(民意)에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대의민주주의의 발원지인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Brexit) 찬반 국민투표에서조차 국민을 속이는 선동 문구가 있었다니 어처구니가 없지만. 달을 보라는데 국민이 달을 가리키는 정치인의 손가락만 보게 한다면 그것은 바로 국민을 속이는 범죄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필자소개 :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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