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당원들은 반기문을 대선주자로 공증한 셈
비박(非朴)은 없었다. 애초 새누리당 전당대회는 친박계 대 비박계 간 전면적 세 대결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 친박계가 당권을 갖게 되면 변화가 어렵다고 본 비박계가 절박한 심정으로 결집하면서 경쟁구도를 만들어낼 것으로 봤다. 하지만 비박계는 3명으로 나뉜 친박 성향 후보에 맞서 두 번의 단일화 끝에 최종적으로 1명을 내세웠지만 이정현 후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당원들은 친박계가 다시 당의 주류가 되는 것이 이후 대선을 위해서도, 무너진 당의 지지층 복원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인식을 어느 정도 공유했을 수 있다. 지난 20대 총선의 막무가내 공천과 참패의 책임에서 친박계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은 ‘친박 이정현’이었다.
김무성·오세훈은 활로 찾기 어려워
만약 비박계 주자들이 중량감과 대중성을 지녔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수 있다. 비박계에 내년 대선과 관련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력한 후보가 있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다. 당이 변해야 한다는 인식은 폭넓게 형성되었지만, 비박계에서 변화의 확신을 인물을 통해 보여주지 못했다. 친박 이정현 의원의 대표 당선은 비박계 차기 주자들에게 당의 미래를 맡기면 의미 있는 변화가 있으리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영입의 불가피성을 ‘공식적 절차’를 통해 인정한 것으로 정치적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
이번 새누리당 전당 대회는 내년 대선의 준비단을 구성하는 성격이었다는 점에서 반 총장을 받아들일 작업을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정현 대표는 전당대회 과정에서 이를 예고하기도 했다. 이른바 슈퍼스타K 방식의 대선 경선을 실시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핵심은 외부인사들에게 새누리당 경선을 개방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당내 주자들이 경선 과정에서 누릴 수 있는 프리미엄을 없애겠다는 의도도 깔려있다.
상대적으로 당내 주자들은 당원 동원력이 있어 당원 중심 경선에서 유리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외부인사들이 참여해도 불이익이 없도록 당원들의 참여 비중을 줄이고 일반인들의 참여 비중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최고 수혜자는 누구이겠는가. 바로 반 총장이다. 이정현 의원의 대표 당선과 외부 개방성을 높이는 경선 방식은 반 총장의 새누리당 입장을 위한 주단을 까는 일이다.
이정현 대표 체제는 반 총장 앞에 대로가 놓이는 일이지만, 반 총장으로서는 부담이 없는 건 아니다. 현 정부의 부정적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는 친박계 카드로 대중에게 인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박계 주자들, 특히 김무성 전 대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활로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 몰렸다. 전당대회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한 후보가 당선되지 못했고, 비박계 동원력도 부실하다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 친박계의 총선 패배 책임론을 소재로 공세를 이어가고자 했으나 이번 전대에서 친박계 후보가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친박의 총선 패배 책임론도 공식적으론 정리된 셈이 되었다. 여기에 앞으로 새누리당 지지층의 반 총장 쏠림현상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낮아진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주목되는 것은 유승민 의원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이며, 이정현 체제는 내년 대선을 준비하면서 유 의원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이다. 친박계는 유 의원에 대한 앙금이 여전하겠지만 대선 경선 흥행을 위해서 유 의원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할 수 있다. 유 의원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박계 내에서 앞서던 주자들이 주춤할 경우, 유 의원에겐 작지만 본인이 주목받을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여당 대표가 호남 출신이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호남을 기반으로 해 온 야당의 대권주자들의 입지에도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과도한 전망이다. 이정현 대표가 새누리당으로서는 불모지인 호남에서 재선에 성공했지만, 아직 호남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대중성을 지녔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본인이 대권주자는 아니기 때문에 호남 민심의 변화와 이로 인한 야권의 대권 경쟁구도에 영향이 있을 것이란 예상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호남 출신이라는 점이 아니라 새누리당과 청와대의 긴밀한 관계가 복원되었다는 점이 야권 주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있을 수 있다. 당청이 한 몸으로 움직이면 여야 간 갈등관계는 더욱 고조될 가능성이 높다. 여당이 야당과 유연하게 협상하기보다는 청와대의 입장을 관철하거나 방어하는 데 우선순위를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여야 간 대립 구도가 더 뚜렷해지면서 야권의, 진보 진영의 대표성 있는 인물들이 더욱 안정성을 강화할 수 있다. 야권 내부의 자연스러운 경쟁이 있을 수 있으려면 여권과의 강대강(强對强) 대치국면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전 대표의 독주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고, 새로운 주자들이 부상할 수 있는 공간이 좁아질 수 있다.
왼쪽부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 AP연합·시사저널 박은숙
야권 주자 행보도 빨라질 것
현재의 구도가 굳어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상위그룹으로 올라서고자 하는 박원순 서울시장, 정계 복귀를 준비 중인 손학규 전 대표, 본격적인 대선전을 준비하고 있는 안희정 충남지사와 김부겸 의원 등은 더욱 적극적 행보를 빠르게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당 또는 안철수 전 대표로서는 친박 이정현 대표 체제가 기회라고 생각할 수 있다. 새누리당의 친박 중심성 강화로 인해 비박의 일부 세력 이탈이 있을 수 있고,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정치적 몸집을 키우고 싶을 것이다. 이미 장외에 나와 있는 정의화 전 국회의장, 이재오 전 의원 등에 PK나 수도권의 비박세력 중 일부가 추가적으로 이탈해 결합한다면 진보와 보수 그리고 중도의 ‘3대3대3’ 대등한 구도를 만들 수 있다고 볼 것이다.
이에 호응해 만약 새누리당의 향후 당 운영이 친박 중심의 폐쇄성을 강화하거나 반총장 영입 과정에서 비박계 주자들에 대한 배려가 현저히 미흡할 경우, 당내에서 길을 찾기 힘들다고 보는 비박계 인사들의 이탈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다만 대중 동원력이 약해 효과는 제한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