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말 독일 TV에서 서울 풍경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마침 학생 기숙사 휴게실에서 여러 친구들과 우연히 그 풍경을 보았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때 서울 거리를 본 친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갑자기 “와우!” 하는 감탄사와 함께 필자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이는 것입니다. 예기치 않은 반응에 내심 놀란 것은 필자 자신이었습니다. 아시아에 위치한 먼 나라의 도시 정도로 보았을 텐데 왜 이리 놀라워할까 궁금했습니다.
며칠 후, TV에서 본 서울 도시 풍경을 친구들이 언급하기에 “서울의 어떤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필자가 기대했던 경복궁이나 당시 중앙청 건물이 아니라, 중앙청에서 바라본 광화문 거리였습니다. 지나다니는 차량은 많지 않았지만 ‘굉장히 폭넓은 거리 광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를린의 ‘보리수 거리(Unter den Linden Strasse)’나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가 연상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했는데 광화문 광장이 무척 인상적이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영국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 미국 워싱턴에는 링컨 기념 광장(Lincoln Memorial), 중국 베이징에는 천안문(天安門) 광장이 있습니다. 이렇듯 세계 유수 대도시에는 하나같이 넓은 광장이 있어 아마도 오래전 독일 친구들도 광화문 광장을 보며 서울이 세계 수준급 도시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추측했습니다.
얼마 전 삼성미술관 리움(Leeum)에서 전시 중인 <한국건축예찬 -땅의 깨달음>전을 관람했습니다. 우리 전통 가옥이나 사찰들이 주변 지형과 자연스레 어우러져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마치 한 폭의 그림인 듯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건축미를 보았습니다. 그렇게 감탄하다가 조선시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 당시 도시 모습을 축약해 제작·전시한 대형 모형물(1142.5x340.6cm,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소장, (주)기흥성 제작) 앞에서 또 다른 감동을 받았습니다.
문득 “사람들은 은연중 경복궁이 자금성을 모방해 (중략) 지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자금성이 완공된 것은 1420년이고 경복궁은 1395년에 완공되었으니, 경복궁이 25년 먼저 지어진 것이다.”(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 ‘인생도처유상수’ 중에서)라는 글을 떠올리며 새로운 감흥을 느꼈습니다. 또한 전시 모형물을 보며 광화문 앞에 조성한 육조거리의 폭이 상대적으로 아주 넓은 것에 놀랐습니다(참조, 사진 자료/광화문과 육조거리만을 부각시킴). 즉 오늘날 광화문 거리의 폭이 620년 전 넓은 모습 그대로를 지켜온 것이라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광화문 광장은 어수선하고 복잡하며 볼거리가 너무 많아 조잡하기까지 한 ‘시장 바닥 같은 광장’으로 변모하고 말았습니다. 정책 담당자가 ‘서민은 시장 바닥 같은 분위기를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게 됩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는 시민을 얕보는 일이며, 시민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성왕(聖王)인 세종대왕을 기리는 동상과 영웅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한곳에 배치한 것도 문제이지만, 성왕이 신하의 뒷모습을 줄곧 보게끔 모시는 것이 예(禮)에 크게 어긋나며, 신하 이순신 장군이 성왕보다 더 높은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것도 참으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오늘날 광화문 광장은 다른 도시의 광장이 주는 탁 트인 시야를 확보하지 못해 답답하기만 합니다. 반세기 전 독일 친구들이 본 ‘시원하고 넓은’ 광화문 광장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연중행사로 열리는 다양한 먹거리 축제며 볼거리 축제 등으로 ‘도시 광장’이 주는 시각적 안식처로서 기능을 더욱더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광화문 광장은 우리의 국격을, 그리고 시민의 품격을 떨어뜨려 짜증스럽고 부끄럽게 만듭니다.
을미년 올해를 보내며 소망하건대 620년 전 우리 선조들이 광화문과 육조거리를 아우르는 큰 광장을 조성하며 후손에게 전한 메시지를 다시 되새겨 이제 ‘광장다운 광화문 광장’을 우리에게 되돌려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필자소개 :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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