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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날짜 [ 2016년03월28일 07시49분 ]

자기가 다시 가보고 싶다던 파리잖아. 다녀와.”

호기롭게 말하며 이 메일로 받은 비행기 티켓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내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정말이야?”를 연발합니다. 하지만 아들과 함께 보내는 유럽 여행에 마음이 들뜨기보다는 걱정이 앞서나 봅니다.

세하는? 자기가 어떻게 아침마다 준비시켜서 학교에 보내? 걔는 아침마다 따뜻한 국물이 있어야 밥을 먹는데 자기가 어떻게 그걸 해? 그리고 자기는 혼자 챙겨서 출근할 수 있어?” 아내의 걱정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이 비행기표 물러, 나 못 가.” 이러는 것입니다.

회사도 10년 근속하면 여행을 보내주는데, 자기는 주부로 23년을 근속했잖아. 그리고 재평이도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보상을 받아야 하잖아? 자격은 충분하니까 걱정 말고 다녀와. 그리고 세하랑 나는 알아서 잘 챙겨 먹을게.”

그 이후로도 가네 못 가네를 몇 번 반복하던 아내는 결국 아들과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내는 파리에서 대학을 나왔지만 필자와 결혼한 이후로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남편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느라 중년이 되도록 흔한 패키지여행조차도 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쯤 파리에서 젊은 시절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며 힐링의 시간을 갖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아있는 필자와 가여운 딸내미입니다. 말은 아침마다 새 밥과 국을 끓여 주겠다고 해놓고 며칠 째 햇반을 레인지에 돌려 먹고 있습니다. 마트에 갔더니 딱 2인분용으로 포장된 국들은 웬 종류가 그리 많은지 반가운 마음에 <차돌 된장찌개>,<가마솥 설렁탕>, <진국 장터 국밥>,<냉이 된장국> 등등을 사다가 냉장고에 재어 놓고 아침마다 냄비에 부어서 끓여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국도 밥도 남기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23년 동안 아내에게 길들여진 입맛이 아내의 빈자리를 단번에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살 같지만, 아침마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햇반을 돌리고, 다 만들어서 포장해 놓은 국을 그냥 냄비에 부어서 끓이고, 양념이 다 되어 있는 고기를 굽는데도 왜 그리 허둥지둥하게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희한한 일은 계란 프라이 하나만 했는데도 몸에 기름냄새가 배는 겁니다. 특히 머리카락에 밴 냄새는 잘 빠지지도 않아서 새 옷을 입고 출근을 해도 아침에 해먹은 반찬 냄새가 하루종일 가시질 않습니다. 예전에 아내가 외출할 때, 음식을 만들고 나가면 음식 냄새가 몸에 배서, 아무리 잘 입고 나가도 부엌데기티가 난다고 한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 필자는 밥은 밥솥이 해주고,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고, 청소는 청소기가 해주는 데 아무렴 밥 한 끼 했다고 부엌데기티가 날까?”하며 반신반의했는데, 직접 경험을 해보니 아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살림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몇 년 전에 미셸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자 자신의 남편인 버락 오바마에게 여보, 우리가 육아와 가사를 공정하게 나누기로 했는데, 아이들 학교 숙제 준비물 챙겨서 학교 보내고 집안일하는 것 등등을 왜 나는 나 혼자서 떠맡아서 하는 느낌이 들죠?”라는 얘기를 했답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미국 대통령도 마눌님에게 바가지를 긁히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 이야기의 요지는, '집안일은 원래 여성이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대한 미국 영부인의 이의제기였던 것입니다.

 

가끔 TV를 보다 보면 우리 남편은요, 집안일을 정말 잘 도와줘요. 빨래도 개어 주고, 청소도 얼마나 잘 도와주는지 몰라요.”라며 부부간의 사랑을 과시하는 출연자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아직 한 번도 우리 남편은 집안일을 혼자 다 해요.”라고 얘기하는 여성 출연자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 얘기는 남자들이 집안일을 하는 것은 도와주는 것이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식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안일이 도와주는 일이 아닌 온전히 내일이 되면 그 중압감이 상상 이상으로 커집니다. 미셸 오바마는 이 중압감에 대한 이야기를 남편인 버락 오바마에게 했던 것입니다.

 

젊을 때는 힘 좋은 남편이 최고고, 조금 나이 들면 돈 많이 벌어오는 남편이 최고고, 더 나이 들면 안 보이는 남편이 최고라는 우스갯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출가하게 되면 밥 차려줄 식구는 남편만 남게 되는데 애증으로 뒤얽힌 남편의 밥상을 차리는 것이 어떤 날은 좋다가도 또 어떤 날은 귀찮아질 수 있습니다. 남편들은 젊었을 때는 직장 생활하면서 회식이다, 동창회다 하면서 좋다는 음식은 다 먹어보지만 그사이 아내들은 아이들이 아침에 남긴 밥 먹어가며 살림을 합니다. ‘장안의 맛집을 다 섭렵했지만 마누라가 차려주는 집밥이 최고라는 사실을 남자들은 은퇴할 때쯤이면 깨닫게 되는데, 이 시기는 아내 역시 부엌데기에서 은퇴를 하고 싶어집니다.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남편 밥상 차려주는 단순 노동의 중압감에서 해방되고 싶은 겁니다. 과거에는 며느리가 들어오면서 며느리가 집안 살림을 이어받아서 했지만 시대는 이미 바뀌어서 황혼에 노부부만 덩그러니 남아, 자식 떠난 집을 지키게 됩니다. '아이들이 출가하면 나도 내 삶을 찾으리라' 다짐하며 30년 세월을 버틴 아내에게, 은퇴 후 자신만 바라보는 남편을 보면 한편으로는 측은하지만 또 다른 쪽에서는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이유는 워낙 다양해서 생각을 말아야지 생각하면 머리만 더 아파옵니다. 어쨌든 오는날의 사회는 한 번 주부는 죽을 때까지 주부로 사는 구조를 만들어 놨습니다.

 

필자는 고작 보름 동안 집안일을 했는데, 게다가 아내가 집안 일을 할 때는 꼼짝도 않던 딸아이가 많이 도와주기까지 했는데도 힘이 들었습니다. 주말에는 빨래와 청소만으로도 하루가 다 지나가고 세탁기를 돌리고 나면 어디선가 미처 보지 못한 빨랫감이 나옵니다. 냉장고에서 음식 재료를 찾는 데 30분이 걸리고 분재에 물도 줘야 하고 음식 쓰레기도 제때 버려줘야 하는등,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했다고 표도 안 나는 일이 집안일이었습니다.

 

내일모레면 아내가 돌아옵니다. 행복한 노후를 위해 아내에게 더 많이 투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아오는 날, 전복죽을 끓여주려고 전복을 손질해서 냉동 칸에 넣어놓았습니다.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나중에 내가 삼식이가 되더라도, 제비새끼처럼 앉아서 차려주는 밥만 받아먹지 않고 같이 준비해서 먹을 테니, 나를 당신의 주방보조로 써주시게.”라고 아내에게 얘기해 볼 생각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필자소개 : 박상도

SBS 아나운서. 보성고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TV 토요일 아침 '모닝와이드' 담당.

 

편집국 (c1221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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