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겪었던 악몽과 같은 일이 생각납니다.
제대 말년 휴가를 온 둘째 아이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왔어요. 평소 전화를 잘 하지 않는 아이인지라 무슨 일인가 싶어 불길한 예감이 스치는데, 아니나 다를까 교통사고가 났으니 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사고 장소는 응달지고 외진 이면도로여서 12월 중순 내린 눈이 녹지 않고 흙먼지와 뒤섞여 결빙된 채 방치된 터에 해질녘이라 시야까지 좋지 않았으니 갖출 것은 다 갖춘, 사고 나기 안성맞춤(?)인 환경이었습니다.
경광등이 번쩍이는 순찰차와 경찰, 렉카차, 보험회사 직원이 보이고, 주민인지 행인인지 모를 수상한 남정네들이 수런거렸어요. 피해 여성은 충격을 받은 듯 경찰차 안에서 고개를 젖힌 채 휴식을 취하고 있더군요.
내용인즉슨 아이가 운전한 승용차가 좌회전 신호가 끝나는 순간 멈추지 않고 진입하다 직진하던 뉴스포티지 승용차의 옆구리 뒷부분을 추돌한 것이었어요. 접촉 부위는 작았지만 피해 차량이 급브레이크를 잡다 방향을 찾지 못하고 미끄러지며 보도블록 턱을 지나 가로등을 들이받는 바람에 대파되었어요.
사고 규모에 비해 아이는 다친 데가 없었고 피해 여성 또한 크게 다치지 않은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답니다. 아이가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때문이었죠. 알량한 보험료 몇 푼 아낀다고 운전자 한정특약 가입을 제대 후로 미뤄놓았거든요.
그로 인해 치른 대가는 컸습니다. 피해자 입원, 피해 차량 수리 등으로 엄청난 금액(1,000여 만원!)이 들어간 물적 피해는 물론이고, 피해자 측과의 녹록지 않은 보상 협의, 틱틱거리는 보험회사와의 이견 조정, 피의자 취급하는 경찰서 출입, 아이가 군인 신분인지라 군 헌병대에 선처 읍소 등으로 인한 심적 피해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죠.
보험약관에도 나와 있다시피 사고는 급격하고 우연한 외부의 원인으로 발생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으면 사고를 미연에 예방하거나 피해규모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1초 먼저 회전했거나, 1초 늦게 출발하였더라면, 아니 아예 멈추어 섰더라면…. 예방과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 사고의 또 다른 특성이 아닌가 합니다.
인력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천재지변이나 블랙스완(Black Swan,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예외적 사고), 컬래트럴 대미지(Collatral Damage, 군경 작전 시 발생하는 우발적 민간인 피해)처럼 운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사고도 있기 마련이지만요.
‘1초’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1초는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최소의 시간단위입니다.
빛이 1초에 36만km를 간다든지 소리가 1초에 340m를 간다든지 하는 계량화된 상식은 사실 크게 와 닿지 않아요.
보통 사람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시간일 수 있죠. 하지만 무시해도 좋을 작은 시간의 단위지만 때에 따라 큰 함의를 지닙니다.
달리기나 수영 같은 기록경기는 몇 분의 몇 초 차이로 순위가 갈리고 메달 색깔이 달라집니다. 축구(연장 막판 결승골)나 농구(버저 비터)처럼 시간제한이 있는 구기에서 보듯 환호작약하거나, 통한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권투, 이종격투기 같은 투기의 경우는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합니다(“비틀비틀, 그로기 상태. 땡! 아, 공이 살렸네요~”).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이란 한자성어를 굳이 떠올릴 필요까지야 없더라도, 시간이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느냐에 따라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이번 사고의 경우, ‘1초’가 문제였습니다.
새삼 무심결에 흘려보내곤 하는 ‘1초’의 중요성을 떠올립니다. 시간 앞에 겸허해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필자소개
김창식
경복고, 외국어대 독어과 졸업. KAL 프랑크푸르트 지점장 역임.
한국수필(2008, 수필) 신인상 . 시와문화(2011, 문화평론)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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